커다란 포스터 침대에 깔린 시트가 마치 빨간 스포츠카 같다. 앤 캐서린은 침대 위에 편안히 늘어져 누워 있다. 물결처럼 하늘하늘한 검은색 실크 잠옷을 입고 무심히 웃는다. 방 안 가득 채운 보물을 만끽하듯 무대 위 배우처럼 양팔을 벌리더니 이내 선언한다. “여기가 바로 내 왕국이야.” 브라이트비저는 이 장면을 영상으로 촬영 중이고 그녀는 손으로 허공에 키스를 보낸다.
장소는 두 사람의 은신처 다락방이다. 언제나 그렇듯 둘뿐이고 시기는 〈아담과 이브〉를 훔쳤던 즈음이다. 둘이 만난 지는 5년이 되었다. 앤 캐서린은 장난스럽고 명랑한 성격에 아담한 체구로 키는 160센티미터 정도 된다. 볼에 보조개가 들어가고 턱 끝이 갈라져 있다. 맵시 있게 살짝 헝클어진 짧은 금발에 머리카락 한 가닥이 개구쟁이처럼 뻗쳐 눈썹 위로 말려 올라갔다. 둘만 있을 때 서로를 부르는 애칭은 ‘니나 Nena’와 ‘스테프Steph’이지만 공식적으로 소개할 때나, 특히 둘을 한 팀으로 묶어 부를 때는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이라고 각자의 성과 이름을 섞어 말한다. 이유는 따로 없다. 그냥 그게 듣기 좋아서 그렇다.
“100프랑을 내시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앤 캐서린이 카메라를 보며 장난스레 말한다. 20달러(약 2만 6,000원) 정도라는 티켓값은 비밀 왕국의 입장료만일까, 아니면 다른 것도 포함된 걸까. 그녀는 돈을 내라는 듯 손바닥을 펼친다.
“너무 비싸네요.” 브라이트비저가 받아치고는 진귀한 보물이 놓인 앤 캐서린의 탁자를 지나 침대 옆 벽면으로 카메라를 돌린다. 17세기 플랑드르 지방의 풍경화가 줄지어 걸려 있다.
“이리 와. 진짜로 키스해줄게.” 앤 캐서린이 달콤하게 속삭이며 카메라 렌즈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좁은 방 안에 관능적 떨림이 감돌고 영상이 멈춘다.
브라이트비저에게 앤 캐서린은 처음부터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다. 아름다운 작품을 보면 손가락부터 전율이 느껴진다. 귓가에 ‘윙’ 하는 소리가 울리고 실제로 살이 떨린다. 감각이 새로이 되살아나고 사고가 뒤흔들리며 마치 그와 작품 사이에 전기가 흐르는 듯하다. 그러다 마침내 심장을 강타하는 느낌이 온다. 작품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고등학교 시절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고고학 모임의 몇몇 지인뿐이었다. 마지막 학년이던 1991년 가을, 이들 중 한 명의 생일 파티에 갔다가 앤 캐서린을 소개받았다. 생일이 3개월밖에 차이 나지 않았으며 둘 다 알자스 지방 토박이였다. 브라이트비저 눈에 앤 캐서린은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웠고, 예술 작품이 아닌 실제 사람을 보고 심장을 강타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앤 캐서린을 만나기 전까지 여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던 브라이트비저는 그녀를 보자마자 곧바로 사랑에 빠졌다.
앤 캐서린도 브라이트비저를 사랑했다. 그녀를 아는 사람은 하나같이 둘의 관계가 서로를 해치고 말이 안 되며 무모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사실만은 인정한다. 앤 캐서린의 절친한 친구이자 변호사로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에릭 브라운 Eric Braun은 그녀가 무슨 일이든 대충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서 브라이트비저와의 관계 역시 “완전히,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에 빠져 있었다”고 말한다. 앤 캐서린은 사랑에 있어 언제나 전부 내어주거나 하나도 주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직설적인 성격으로 ‘예스’와 ‘노’가 분명한 앤 캐서린에게 브라이트비저는 확실한 ‘예스’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브라이트비저는 아직 어린 시절의 넓은 집에서 부모님과 살고 있었다. 앤 캐서린이 경찰 진술에서 묘사한 바에 따르면 “고급스러운 부르주아 대저택”이었다. 앤 캐서린은 그보다 소박한 가정에서 자랐다. 동생이 둘 있으며 아버지 조제프 클레인클라우스Joseph Kleinklaus는 평범한 요리사였고 어머니 지네트 뮤리너Ginette Muringer는 보육 교사로 일했다. 브라이트비저의 가족은 그때까지도 갑판 아래 침대 칸이 있는 모터보트를 소유하고 있었고, 며칠 동안 제네바 호수를 항해하기도 했다. 스위스와 프랑스를 가르는 산맥 사이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호수다. 가족들은 겨울이 되면 알프스로 스키를 타러 갔다. 여름에는 알자스 지방 시골로 하이킹을 가고 전통 식당에서 외식을 했다. 브라이트비저는 테니스 교습을 받았고 스쿠버다이빙 자격증도 땄다. 앤 캐서린의 어린 시절에는 전혀 없던 일이다.
브라이트비저와의 만남은 앤 캐서린 안에 잠들어 있던 모험심을 일깨웠다. 브라운은 브라이트비저를 만나기 전 그녀의 삶이 “조금 단조로웠다”고 이야기한다. 앤 캐서린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동안 집에 차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운전을 할 줄 몰랐다. “앤 캐서린에게 부족했던 열정을 브라이트비저가 채워주었죠. 아니, 그 이상이었어요. 완전히 살아 있는 느낌을 주었으니까요.” 브라운의 말이다.
마찬가지로 브라이트비저도 앤 캐서린 덕분에 주위의 아름다움에 더욱 눈을 뜨게 되었다. 늘 다양한 작품과 예술 양식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지만 앤 캐서린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의 뮤즈였고 그녀를 만나고 나서야 성숙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브라이트비저에 따르면 앤 캐서린은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 할 것 없이 옷에서부터 골동품, 순수 미술에 이르기까지 “흠잡을 데 없는 취향”을 가졌다. 두 사람은 자주 박물관에 갔다. 주로 작은 도시에 있는 특이한 박물관을 찾았고 왕족이 쓰던 물건과 중고 장터에 어울릴 법한 물건이 뒤섞인 곳을 좋아했다. 물건 자체보다는 그 물건에 담긴 고유한 정서를 중시했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조용히 전시실을 둘러보곤 했다. 게다가 앤 캐서린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은 한층 더 밝아졌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그렇기에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어요.”
브라이트비저의 삶에서 많은 것이 무너져 내렸을 때 앤 캐서린이 곁에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기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헤어졌고, 어머니와 대저택에서 나와 거처를 옮겨야 했다. 앤 캐서린은 함께 고난을 겪으며 어떤 시험을 통과하기라도 한 듯, 이 일로 둘의 관계가 더 공고해졌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이후 브라이트비저의 아파트에서 같이 살다시피 했고 그들은 파란색 싸구려 합판으로 만든 작은 침대에서 함께 잠을 잤다. 아직 다락이 있는 집에 살기 전이었다. 벽에는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브라이트비저는 그중 더스틴 호프만이 출연한 〈레인 맨〉이 기억난다고 회상했다. 둘은 기질적으로도 잘 맞았다. 브라이트비저는 때로 감정이 큰 폭으로 널뛰는 편인 데 반해 앤 캐서린은 차분히 중심을 잡는 성격이었다. “바로 옆에서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사람이었죠.”
미래에 관해서는 둘 다 어려운 상황이었다. 브라이트비저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법학과에 등록했지만 한 학기만 다니고 중퇴했고, 앤 캐서린은 간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다가 시험에 떨어졌다. 결국 간호 조무사로 취직해 환자들의 요강을 치우고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을 했다.
1994년 늦은 봄 어느 주말, 두 사람은 알자스 지방의 탄이라는 마을을 찾았다. 돌 첨탑이 우뚝 솟은 고딕 양식의 교회 주변으로 오래된 집들이 모여 있는 농촌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16세기 곡물 창고를 개조한 박물관에 들렀는데, 브라이트비저는 2층에 있는 진열장을 보는 순간 눈을 뗄 수 없었다. 온몸에 전율이 흐르기 시작했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심장을 강타하는 순간이 또 한 번 찾아왔다.
호두나무를 수작업으로 깎아 조각했고 총신과 손잡이는 은으로 세공한 18세기 초 수발총이었다. 처음에는 비슷한 물건을 이미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수발총을 몇 개 본 적이 있는데, 집 안에서 브라이트비저가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었고 아버지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짐을 싸서 나간 이후 수발총 역시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아버지가 가지고 나간 물건 중 몇 개는 비슷한 것이라도 다시 손에 넣고 싶어서 근처 경매에서 구매를 시도한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돈 많은 딜러들이 입찰해 갖고 가버렸다. 그러고는 자기들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열 배도 넘는 가격에 되팔곤 했다. “정말 저열한 짓이었죠.”
그는 진열장의 총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더는 보고 있기가 싫어졌다. 그 대신 집으로 가져가고 싶어졌다. “아버지가 갖고 있던 어떤 것보다 더 오래되고 훌륭한 총이야.” 브라이트비저가 앤 캐서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걸 가지면 아버지에게 그야말로 ‘빅엿’을 먹이는 거지.” 앤 캐서린은 부모님과 사이가 좋았지만 브라이트비저가 아버지를 향해 갖는 분노에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를 직접 만난 적도 있지만 썩 잘 지내지 못했다. 브라이트비저에 따르면 아버지는 평범한 축에 속하는 앤 캐서린의 출신 배경을 가지고 까다롭게 굴었다.
“문에 잠금 장치가 없어.” 브라이트비저는 진열장을 가리키며 앤 캐서린에게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박물관 경비원 일을 한 지 3년이 지났지만 그의 눈은 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았다. 주변에 다른 관람객은 없었고 경보 장치도 보안 카메라도 경비원도 없었다. 박물관의 유일한 직원인 아르바이트 학생 한 명은 1층에 있었다. 브라이트비저는 그날 배낭을 메고 갔는데, 작은 책가방이지만 수발총 한 자루를 넣기에는 충분했다.
앤 캐서린의 대답으로 그 순간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둘 다 고작 스물두 살이었다. 앤 캐서린을 만났을 때 브라이트비저는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고 경찰과 몸싸움을 하는 등 자잘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앤 캐서린은 법을 위반하는 일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브라이트비저의 행동에 거부감을 갖지는 않았다.
“앤 캐서린은 그런 면을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꼈을 거예요.” 브라운이 천천히 생각하다 말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수발총과 함께 새로운 모험의 기회가 눈앞에 있다. 앤 캐서린은 이날의 대답으로 반항아 애인을 사로잡을 수 있었고 더 가까워졌으며 아마도 전보다 더욱 사랑받았을 것이다. 지인들은 그녀가 청춘의 환상 같은 것에 빠진 상태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마치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말이다.
“그렇게 해. 가져가자.”